c. 기우님

 

- 살인죄도 그렇게나 빠르게 드러나지는 않겠지, 숨겨두려는 사랑만큼은. 사랑을 하면 한밤중도 낮과 같아.

 

좋아하는 희곡인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글을 빌려왔어요. 사랑은 우연과 우연이 얽혀 자아낸 필연,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새로운 독서, 멀쩡한 사람을 미련한 바보로 만드는 저주.

 

두 사람도 가라르하면 빠질 수 없는 (!) 카레를 만들어 먹기도 했을 거에요. 멀리는 나가지 못하고, 날씨 좋은 날 엔진시티 근교의 와일드에리어에서 포켓몬들을 꺼내놓고 여름이가 좋아하는 특선사과와 관장님이 좋아하시는 나무열매들을 꺼내서 요리를 하는 둘. 바들바들 칼질을 위태롭게 하는 여름이가 걱정되어서 시범을 보여주시겠다며 뒤로 가서 손을 쥐고 칼질을 도와주는 관장님. 힘은 약간 빼고, 잡아주는 손 위치는 여기로... 잠깐, 손? 당황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그란 정수리가 제 가슴팍 바로 앞에 위치해있고, 자신은 거의 끌어안듯 뒤에서 팔을 뻗고 계셨다는 걸 알아챈 관장님.

 

오히려 여름이 쪽은 요리에 집중하느라 상황을 눈치채지 못해 고개를 돌려서 "관장님은 요리도 잘 하시네요!" 같은 말이나 하고 있는 중.

 

실없는 말을 하시네요. 저는...

 

말을 이으려는 순간 배시시 웃는 여름이의 맑은 하엽빛 눈동자를 보고 그만 할 말을 잊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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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 부끄러운 마음을 누르고 닫아 병 안에 가둬두었더니, 억지로 차가워지려는 시도에 얼음물마냥 되려 팽창해서 새어나오려고 하는 춘심. 이미 거쳐온 계절을 다시금 바라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눈 앞의 이 아이만 보면 자꾸만 발걸음이 더뎌진다.

 

이 여자애가 눈에 밟힌다. 설레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애정이 담긴 글들의 주인, 잠시만 눈을 떼도 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제 인생과 싸워나가는 올곧은 작은 전사. 그렇기에 더더욱 저보다 나은 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저 치기어린 마음 혹은 일시적인 춘몽일 것이라, 동경의 연장선일 것이라 스스로를 타일러가며 참아왔지만 이런 순간들이 최근 점점 늘어나는 것을 그는 스스로도 느꼈다. 연풍이 스쳐가며, 풀꽃을 닮은 향이 제 코를 간지럽혔다. 동시에 포플러의 초대로 보았던 극의 스쳐지나간 대사가 떠오른다.

 

 

 

Where love is great, the littlest doubts are fear.

Where little fears grow great, great love grows there.

 

Hamlet :: William Shakespe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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